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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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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가 정말 수영을 잘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이 말이 그랬다. 킥판 없이도, 구명조끼 없이도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을 물었다. “정말?” 아이는 어김없었다. 항상 수영장을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린이집 수영교실을 몇 개월 다녔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가 정말 수영을 잘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이 말이 그랬다. 킥판 없이도, 구명조끼 없이도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을 물었다. “정말?” 아이는 어김없었다. 항상 수영장을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린이집 수영교실을 몇 개월 다녔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수영장에서 만났던 7월의 무더웠던 그날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기대와 달리 아이는 수영을 전혀 못했다. 물속을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다. 어린이집 수영교실을 통해 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친구가 정말 영어를 잘하는 줄로만 알았다. 레오는 영어로 글도 쓸 줄 안다기에 몇 번을 물었다. “정말?” 심지어 어린이집에 미국인 선생님이 오면 자기가 하지 못하는 말을 모두 대신해준다고 했다. 한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아이에 비하면 정말 영리한 아이인가 보다 했다. 며칠 전 어린이집 참관 수업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레오와 내 아이는 미국인 선생님의 지시와는 정반대로만 움직였다. 어린이집 영어교실을 통해 미국인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아이는 우리를 속인 것일까? 아이는 숲길 체험을 하다가 호랑이를 봤고, 헬리콥터를 타고 소풍을 갔고, 어린이집 버스가 아파트를 박았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면 어떡해!” 아이 말에 놀라는 시늉을 하자 아이는 호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떻게 호랑이로부터 도망쳤는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어린이집 버스가 다 부서졌으면 어떡해!” 이번에는 버스가 왜 하나도 부서지지 않았는지, 부딪힌 아파트는 어떻게 되었는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밑도 끝도 없이 해댄다. 자신이 수영을 잘한다느니, 레오는 영어를 잘한다는 이야기도 헬리콥터를 타고 소풍을 갔다는 이야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아빠라는 자의 기대와 부러움 때문에 어떤 이야기는 믿으려 했고, 어떤 이야기는 믿지 않으려 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있고,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을 배워나가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세계와 엮어나가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모든 이야기는 삶에 대한 반영이라는 점에서 절반은 사실이고, 삶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절반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형들처럼 수영을 하고, 교통사고가 나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숲에서는 호랑이를 만나는 세계, 그리고 영어를 못해서 답답한 자신 대신 말을 해주는 레오가 있는 세계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아이의 ‘이야기’가 창조해낸 세계다. 이것은 단순한 거짓말도, 말이 되지 않는 허튼 이야기도 아니다. 아이의 삶, 기대, 꿈, 스트레스가 녹아 있는 ‘환상의 이야기’다. 아이는 이야기를 하며 숲을 거닐기도 하고, 영어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방법도 찾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별하는 현실 원칙은 부모가 아니라도 가르쳐줄 사람이 많다. 하지만 환상의 이야기는 부모라야 인내하고 옹호해줄 수 있다. 아이의 이야기를 허튼소리로 치부하면 아이는 이야기하기를 멈추고, 성장해서는 자신만의 이야기 없이 부모나 사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정말?”이라며 사실을 캐묻는 질문 대신, “그러면 어떡해!” 라는 탄성이 환상을 옹호하는 방패다. 아빠가 방패가 되어주리. 아빠의 방패 아래 아이야, 운명의 주인, 영혼의 선장이 되어라!



글을 쓴 권영민은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철학본색’이라는 철학 교육, 연구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spermata.egloos.com)에 쓴 에세이를 모아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를 출간했다. 대답보다는 질문을 하고자 하는 철학이 좋은 부모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일러스트 박새미 | 담당 장보임 객원기자

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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