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매거진

딸·아들 바보 말고 마누라 바보

댓글 0 좋아요 0



오랜만에 본가를 찾아 빛바랜 앨범을 펼쳤다. 오래된 앨범에는 막내아들인 내가 뽀글머리를 하고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뽀글머리도 싫고 치마를 입는 것도 싫어 실랑이를 했던 기억은 뚜렷하다. 어머니는 새우깡으로 설득했다. 사진 한 장만 찍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정도로 타협했다. 사진 속 표정은 불만 반, 수줍음 반이다. 사진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친척 누나에게 줄 선물인데 사이즈가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도 사진으로 남기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어머니는 아들만 둘을 두셨다. 장가를 갈 때가 되어서야 알았지만 딸이 있는 집을 부러워하셨다. 나름 애교도 있고 여전히 살가운 막내아들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마다 “내가 딸을 하나 낳았어야 하는데, 난 목매달이야”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인지 둘째 손주로 딸을 안겨드렸을 때 유난히 기뻐하셨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남아선호의 풍토가 깊은 우리 사회이지만, 요즘은 많이 변했다. 딸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오죽하면 ‘딸 바보’라는 단어까지 생겼으랴. 아내가 임신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성별에 대한 기대를 담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남편 입장에서는 ‘딸 바보’라는 타이틀을 한번쯤 가져보고 싶기도 하고,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아들의 모습도 상상해본다. 어떤 모습이라도 기분 좋은 상상이다. 엄마 아빠는 물론 예비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각자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 사실 10개월 후 태어날 아이의 성별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인데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성별에 대한 기대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과도한 기대는 가정의 평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개월 동안 예쁜 것만 보고 행복한 생각만 해도 모자랄 아내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일부러 성별을 확인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다림을 더욱 설레게 만드는 나름의 방법이다. 출산 전후를 막론하고 아이가 기대했던 성별과 다르다고 아내와 가족들에게 마음을 표출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다. 성별에 대한 집착 혹은 요구는 아내에게 죄책감과 패배감만 안기는 스트레스 덩어리일 뿐이다.

굳이 생물학적으로 따지자면, 아들 혹은 딸을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남편이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한번씩 들어본 이야기겠지만, 정자에 있는 X 혹은 Y염색체가 성별을 결정하는 열쇠다. 염색체를 구분해 난자에 보내는 남편 혹은 염색체를 구분해 받아들이는 난자를 가진 아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편의 ‘탓’ 아니 ‘덕분’이라는 말이다.

남편의 역할은 단순하다. 임신 소식을 처음 접한 마음 그대로 아내가 탈 없이 10개월의 여정을 소화하고, 성별과 관계없이 건강한 아이와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아내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고, 아내의 편이 되면 된다.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또 어떠하랴. ‘행복한 우리 가족’을 만들 수만 있다면 이 땅에 부러울 이는 없다.


★ 임신한 남편을 위한 전술 - 아내의 든든한 골키퍼가 되어주세요
예비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이 성별에 대한 기대를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은근하면 다행, 과도하면 부담 혹은 상처다. 심한 경우에는 산모에게 “고생했다. 축하한다”는 말보다 “어서 몸 추스르고 둘째는 아들 낳아라”는 말을 한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골키퍼’가 되어야 한다. ‘딸 바보’ ‘아들 바보’가 아닌 ‘마누라 바보’가 든든하게 평생 지켜주겠다고 말하자. 혹시 어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면 ‘염색체 이론’이라도 꺼내 들고 ‘모두 내 탓’이라고 선제공격을 펼치는 것도 방법이다.


글을 쓴 <풋볼리스트> 김동환 기자는 낮에는 축구 전문기자로 현장을 누비고, 밤에는 에서 축구 경기 해설을 하고 있다. 첫째를 낳고 ‘임신한 남편’를 위한 처세서 <임신에 대처하는 유능한 아빠양성>을 출간한 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담당 한미영 기자 일러스트 애슝 

2016년 5월호
  • 페이스북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