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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늦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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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도서관 1층에 가면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엄마와 종종 게임을 하던 아이가 아빠와도 해보고 싶다고 해서 도서관으로 갔다. 수십 종의 보드게임이 있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처음 아이가 골라온 건 ‘쿼리도’라는 게임이었다. 우리 모두 처음 접하는 게임이었지만 규칙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가로 9칸, 세로 9칸으로 된 게임판의 반대편 양 끝줄에 각자의 말을 서로 마주 보게 세워둔다. 그리고 게임판에 세울 수 있는 9개의 나뭇조각을 이용해 상대 말이 내 말이 처음에 서 있던 반대편 줄까지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나는 아이가 움직이는 말을 막으려 나뭇조각을 무리해서 세우다가 번번이 졌다. 정말 내 꾀에 빠져 아이의 수를 간파하지 못해 진 것이다.

아이가 다음으로 가져온 건 ‘숫자의 강’이라는 게임이었다. 게임판에는 숫자가 1부터 100까지 적혀 있고, 각각 6개씩 집을 나눠 갖는다. 그리고 카드를 두 번 뽑는데, 처음 뽑은 카드에 적힌 숫자에 그다음 뽑은 카드에 적힌 숫자를 더하거나 빼서 나온 숫자에 자기 집을 세운다. 예를 들면 처음 뽑은 카드에는 ‘10’이 적혀 있고, 다음으로 뽑은 카드에는 ‘-7’이 적혀 있다. 그러면 게임판에 ‘3’이라고 적힌 곳에 집을 세우면 된다. 두 사람 중 먼저 6개의 집을 세우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먼저 아이가 카드를 뽑았다. 처음 뽑은 카드에는 ‘93’, 다음 카드에는 ‘-17’이 적혀 있다. 아이는 엉뚱한 답을 냈다. “85? 86이야? 몰라. 하기 싫어. 다른 것 할래” “안 돼. 이거 계속하자. 다시 계산해봐.” 아이는 다시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겨우 답을 냈다. 다시 아이의 차례다. 이번에는 ‘53’이 적힌 카드와 ‘-10’이 적힌 카드다. “이번에는 쉽지? 53에서 10을 빼면 얼마야?” 아이는 다시 한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빠, 44야?” “아니. 다시 생각해봐”. “45? 46?” 아이의 대답을 듣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야, 53에서 10을 빼는데 어떻게 45야?” 아이는 화를 내는 아빠를 보고 긴장했다. “아빠, 43 맞아?”

나는 어느새 “앞의 숫자는 앞의 숫자끼리! 뒤의 숫자는 뒤의 숫자끼리 계산해!”라며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아이는 얼어붙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화가 난 아빠가 겁이 났던 것일까. 떼를 쓰지도 않았고, 집에 가자고 졸라대지도 않았다. 조용한 도서관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다그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아이와 게임하러 와서 뭐 하는 건가’ ‘이러다가는 아이가 오히려 수학과 멀어질 텐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걸 보며, 아직 뇌가 준비도 안 됐는데 벌써 셈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했던 건 바로 나였다. 그깟 더하기, 빼기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두뇌 회전을 해야 하는 쿼리도는 아이에게 진 주제에 아이를 혼낼 자격이 있기나 한 걸까? 도서관에서 돌아와서도 종일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만들어 풀리고, 53에서 10을 빼는 것은 7이나 8을 빼는 것보다 얼마나 간단한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계산 요령을 가르쳤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아이는 이렇게 물었다. “아빠, 오늘 나한테 왜 화를 많이 냈어?” 아이를 재우고 나와 자책감에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야 아이에게는 53에서 10을 빼는 일이 53에서 7이나 8을 빼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것을 깨달았다. 아직 손가락 계산기가 필요한 아이에게 10을 빼는 것은 앞자리 5를 4로 바꾸면 되는 간단한 계산이 아니다. 53부터 52, 51, 50… 44, 43. 그렇게 하나씩 열 번을 빼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 7이 8을 빼는 것보다 더 복잡한 계산이 되는 것이다. 원리를 알아가는 아이에게 요령이 없다고 다그친 아빠라면 쿼리도를 아이에게 지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당연한 결과다. 내일은 아이에게 보드게임을 하러 가자고 해봐야겠다. 아빠의 늦은 깨달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말이다.


글을 쓴 권영민은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철학본색’이라는 철학 교육, 연구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spermata.egloos.com)에 썼던 에세이를 모아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를 출간했으며, 대답보다는 질문을 하고자 하는 철학이 좋은 부모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담당 우수정 기자 일러스트 애슝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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