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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놀부가 흥부를 환대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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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는 왜 그렇게 심술이 난 걸까?” <흥부전>을 읽으며 물었더니 아이는 “흥부가 자꾸 쌀을 달라고 하잖아”라고 했다. 기대했던 답과 달랐다. 아이는 “쌀은 어차피 놀부 거니까 놀부 마음대로 하면 돼”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놀부가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막을 수는 없다는 논리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놀부가 부자가 된 것은 부모님이 재산을 물려줬기 때문이잖아. 흥부를 빼고 놀부만 부모님 재산을 전부 가지는 것은 잘못된 거야. 흥부가 가서 쌀을 달라고 한 것은 잘못이 아니야.” 그러자 아이는 “아니야. 흥부가 태어나기 전에는 원래 놀부밖에 없었으니까 전부 다 놀부 거야”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 재차 물었다. “아빠,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아빠가 사준 장난감은 다 내 거라고 했지? 아빠가 내 장난감은 내 동생한테 안 줘도 된다고 했지? 놀부도 그런 거야.”

나는 그동안 <흥부전>을 단순히 착한 사람은 복 받고, 못된 사람은 벌 받는 이야기로만 알았지, 형제 관계에 대한 이토록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 그동안 흥부 관점에서만 이 이야기를 읽어온 것일까? 아이는 왜 놀부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내게도 여동생이 있지만 한 살 터울이라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여동생이 없었던 적이 한순간도 없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나 역시 엄마와 아빠, 온갖 장난감을 독차지하고 있었겠지만 자의식이 있었던 순간부터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 장난감을 동생과 나눠 갖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니 내 눈에는 당연히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을 혼자만 독차지하는 놀부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달랐다. 집 안의 장난감이나 애착인형인 키티는 물론 엄마와 아빠, 할머니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큰아이의 관점에서 동생은 없었다가 생긴 존재지만, 둘째 아이의 관점에서 형은 태어나면서 원래부터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시차(parallax·視差)가 생기게 된다.

지난달 태어난 둘째 아이는 큰아이와 여섯 살 차이가 난다. 큰아이는 우리 집에 동생이 처음 온 날 “귀찮아, 시끄러워”라 했고, 며칠 후에는 “쓰레기통에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의 관점에서 동생이란 존재는 자기 세계의 침범자에 불과하다.

아이와 놀부 관점에서 <흥부전>을 다시 생각해보니 놀부는 보통 사람에 비해 특별히 더 심술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흥부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부모 재산은 모두 놀부 차지였던 것도 맞고, 놀부가 자기 재산을 자신이 쓰고 싶은 곳에 쓰는 것도 우리는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놀부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일까? 놀부와 흥부의 가장 큰 차이는 제비에 대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부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아무 대가 없이 오직 제비를 환대하는 마음에서 고쳐준 것과 달리, 놀부는 제비를 환대하기는커녕 다리를 부러뜨렸다. 놀부에게 잘못이 있다면 부모의 재산을 독식한 것에 있다기 보다 흥부와 다리 부러진 제비와 같은 약한 자를 환대하지 않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동생이 생긴 아이를 돌보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책을 찾아보니 둘째가 침범할 수 없는 첫째만의 공간, 장난감, 인형을 주라는 조언이 많았다. 아이에게 아직 얕은 숨을 쉬며 목도 가누지 못하는 동생을 안아보게 했다. 아이는 마치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만지듯 동생을 조심스레 안고서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고 했던 키티 인형으로 데려가 눕혔다.




글을 쓴 권영민은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철학본색’이라는 철학 교육, 연구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spermata.egloos.com)에 썼던 에세이를 모아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를 출간했으며, 대답보다는 질문을 하고자 하는 철학이 좋은 부모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담당 한미영 기자 일러스트 애슝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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