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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자의 육아, 그건 사랑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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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피플 사이에서 포마드가 유행한다는 것, 여행지 패션은 에스닉 스타일이 정답에 근접하다는 것 정도는 꿰던 남자다. 홍콩 느와르 영화 속 같은 남심 저격 바버샵에서, 수달보다 매끈한 헤어스타일로 서정문 PD가 자연스레 옆 <맘&앙팡>을 꺼내 든다. 놀라울 것도 없다. 20개월 딸아이의 ‘아쁘아’가 된 후 생긴 백만가지 변화 중 하나니까. 남자여서 당혹스럽지만 아빠여서 어여쁘다는 그의 육아 본심 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본다.




방송국 아빠들의 고민
✎ 육아의 외주화, 이게 정말 최선일까요?
‘이모님’들이 사라진다면 아마 우리나라 방송국이 올 스톱할 거예요. 아내가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어서 우리도 산후도우미로 오셨던 이모님이 19개월까지 딸아이를 돌봐주셨죠. 얼마 전부터는 입주 도우미 이모님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요. 요즘 방송국에서는 프로그램의 외주제작 체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요, 아빠가 되고 ‘육아의 외주화 현상’을 고민하게 되더군요. 야근과 밤샘이 숱한 직업인지라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하면 엄마 PD들은 편집실에서 울기도 많이 울어요. 내 아이를 내가 온전히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맞벌이 부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이모님께 온전히 맡기자니 미안한 마음도 들어요. 이모님의 도움이 필수적인데, 개인 간의 계약이어서 세제혜택이 전혀 안 되는 점이 아쉬워요. 정부가 육아 돌보미 이모님들의 4대보험을 보장해주는 등 시스템을 마련해주면 좋겠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방송국에서는 아빠의 육아휴직을 장려하고 있어서 저도 올해 계획하고 있어요.

육아정책연구소(2014년) 조사 결과, 중국 육아 돌보미 이모님들의 근로 만족도는 91.4%, 부모들의 고용 만족도는 54.8%로 나타났다.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적 없다’는 응답도 63.6%나 차지했다. 이 대안으로 홍콩의 ‘베이비시터 인증제’가 주목받고 있다. 홍콩 내 외국인 돌보미가 늘어나자 베이비시터의 한 달 급여가 5000홍콩달러(약 79만원) 이상 되도록 정부에서 관리한다.


이모님과 꽁냥꽁냥 잘 지내려면?
✎ ‘부부의 쉼터’라니요, 집은 ‘이모님의 직장’입니다!
아이가 없을 때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어요. 유부남 선배들이 퇴근할 때마다 서로에게 “출근 잘해라” 하고 ‘웃프게’ 인사하는 이유를요. 까마득한 선배들은 “촬영하고 편집하고 회식하고 살았지, 나는 아이가 어떻게 크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시기도 해요. “니들 참 힘들겠다” 동정도 받고요. “아빠를 찾는 시간은 길어야 10년이니까 아이가 찾을 때 잘해라”라고 조언해주는 선배가 고맙지만, 이모님이 안 계시는 주말이 두렵기도 해요. 입주 이모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 집은 아내와 저의 쉼터이기도 하지만 이모님의 일터가 됐어요. 이모님은 일하러 오시는 거니까 우리 집이 그분의 직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아내도 “부모인 우리도 아이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은 이모님한테 바라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살림이며 육아며 완벽을 기대하는 것도 이모님과 결별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요.


맞벌이 아빠의 속사정
✎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저도 나영석이 될 수 있을까요?
맞벌이 부부의 삶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가는 중소기업과 비슷해요. 서로 육아와 살림을 확실하게 분담해야 하고, 맡은 일을 철저하게 해서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죠. 일례로 아이가 똥을 누면 제가 출동해요. 똥 치우는 역할을 맡고 있거든요. 딸이 심심해서 보채면 놀이터로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기, 외출 후 목욕을 시키는 것도 제가 맡고 있어요. 아내는 이유식과 그 밖의 육아를 담당하죠. 편성부에 있어서 시간 여유가 생긴 덕분에 딸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딸의 첫 마디가 ‘아쁘아’였으니 보람도 있어요. “손톱 밑에 아기 똥이 껴본 자만이 육아를 논할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하죠. 그런데 마음 한편에는 PD니까 프로그램으로 빛나고 알려지고 싶은 바람이 늘 있어요. ‘육아에 상당 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면서 내가 나영석, 최승호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도 해요.


"결국 시간인 것 같다. 끊김이 없는 시간. 빈 화분에 흙을 채워 넣어 다지듯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으면, 언젠가 가슴이 없는 내 품에서도 딸이 세상의 불안과 불만을 잠시 잊을 수 있겠지. 그러리라 믿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남자만 ‘백퍼’ 공감 육아 심리
✎ 저도 들은 이야긴데요, 남자에게 육아는 입양아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대요
육아로 인생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엔 분노가 치밀어요. 그렇다고 육아가 마냥 아름다운 일이라고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아빤데 왜 이렇게 아이가 낯설지?” “왜 내 마음만큼 아이를 사랑해주지 못하지?” 하고 고민하는 아빠들이 사실 많아요. 저도 그랬어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촬영 때문에 한 달 반 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다음 날 배웅 나온 딸이 “또 와”라고 했대요. 딸의 말에 상처 입은 그는 “나와 함께한 3년이라는 축적된 시간이 딸의 내면에서는 완전히 리셋돼 있었다”고 고백했어요. “아빠에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입양아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는 대목에도 공감해요. 결국 시간이 필요한 거죠. 가정 안에서 헤매는 아빠들 진짜 많아요. 그들에게 진짜 위로는 “노력하면 당신도 육아를 잘할 수 있어요!”가 아니라 “나도 그랬어요. 원래 그렇더라고요”라는 말일 겁니다. 실제 내 경험을 보여주고 “걱정 마세요. 천천히 친해지면서 서로 사랑해주면서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면 됩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육아 에세이 ‘서정문의 육아감각’(https://brunch.co.kr/@whomoon/28)을 연재하고 있어요.


"나는 더 이상 남성잡지를 읽는 남자가 아니다. 미용실이나 병원 대기실에서는 <맘&앙팡>을 꺼내 읽는다. ‘모던하고 시크한 섹시 스마트 가이’가 될 시간도, 여유도, 이유도 없다."


아빠도 육아 불안감을 느낄까?
✎ 대한민국이 과연 내 딸을 잘 키워줄지 불안해요
어린이집 입학부터가 전쟁이잖아요. 마포에 사는데 대기 순위 200번을 받았어요. 맞벌이 부부 가산점을 받아서 회사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죠. 딸아이가 20개월인데, 저보다 체력이 좋아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놀아주다 보면 남자인 저도 허리가 뻐근합니다. 아빠로서 가장 두려운 건 우리 부부를 제외하고는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양가 부모님은 멀리 계셔서 도움받을 수 없으니, 고립된 섬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모든 게 처음이라서 서툴고 해보니까 눈물나게 어려운데, 온전히 우리 부부의 몫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불안해져요. ‘내 아이가 나중에 이 나라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요. 부모가 사랑하며 애지중지 키워도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사회가 키워주는 시간이 훨씬 많을 텐데. 이 사회가 과연 우리 아이를 잘 키워줄까요?


자연주의 출산을 선택한 이유
✎ 우리 가족이 주인공인 출산을 원했어요
아내가 자연주의 출산을 원했어요. 어쩌면 단 한 번이 될 수도 있는 출산의 경험을 의료진 중심이 아니라 ‘우리 부부만의 행복한 출산’으로 만들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공감했어요. 아내가 임신했을 때 저도 딸에게 편지를 쓰는데 울컥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3박4일 진통 끝에 태어난 딸은 울지 않고 씩~ 웃어주더군요. 양가 부모님께서는 딸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셨고요. 육아가 지칠 때 출산 동영상을 보며 힘을 낼 정도로 아내는 출산이 행복한 기억이라고 해요. 자연주의 출산은 임신부터 출산까지, 순간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PD라서 육아가 쉬울까?
✎ 아빠가 되고 PD라는 직업에 더 깊어졌죠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이듬해 딸이 태어났어요. 그런데 실제 사고가 났던 해보다 딸이 태어난 해의 4월이 더 북받치더군요. 저는 교양 파트 PD이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직업인데요, 부모가 되고 나니 다른 부모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감정의 증폭이 커졌다고 할까요? 사람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의 단층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PD는 육아에 유리한 직업이 아니지만 아빠라는 역할은 저의 직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내가 꿈꾸는 아빠는
✎ 내 앞가림은 하는 아빠, 효도를 꿈꾸지 않는 아빠요
딸이 과자를 먹다가 맛있으면 씨익~ 웃으면서 제 입에 과자를 쏙 넣어줘요. 그 순간 저는 세상을 다 가진 남자가 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는 느낌이 경이로울 정도예요. 내가 아빠인 것이 벅차고 고맙죠. 지금은 가족이지만 언젠가 딸은 독립해서 살아갈 테니 우리는 어쩌면 헤어지는 중인 것 같아요. 딸에게 효도를 기대하지 않는 아빠, 자기 앞가림은 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각자의 삶을 응원할 수 있는 사이였으면 좋겠어요. 편하게 연락해서 밥 먹고 맥주 한잔할 수 있는 그런 아빠요.


"아이가 내게 온 이유는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 기형도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밤눈’ 중)에 서로를 따뜻하게 껴안아줄 서로가 되기 위해 나와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가장 어두운 순간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기 위해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함께 사납고 고요한 밤을 통과하는 동료가 되기 위해서라면, 육아의 이유는 충분하다 싶다. "


✓ 이제 막 부모가 된 부부에게, 서정문 PD가 추천합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지음 | 은행나무 | 1만3천5백원

달콤한 연애를 하다가 대부분 최종 결론으로 결혼한다. 이때 결혼 생활을 오래 지속한 사람들, 결혼했으나 헤어진 사람들 등 경험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결혼을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물건 하나를 구입할 때도 후기를 꼼꼼히 살펴보는데, 결혼과 육아는 백지 상태로 시작한다. 미리 알고 제대로 준비한다면 결혼과 육아의 진짜 즐거움을 발견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완전히 이해받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딘가 약간은 잘못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위로가 됐다.

“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폴리나>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 미메시스 | 1만8천원
‘폴리나 울리노프’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녀가 명성 있는 안무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려낸 그래픽 노블이다. 주인공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을 보며 나의 딸이 성장하며 느낄 감정과 고민들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예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좋은 동료 그리고 스스로의 고뇌가 필요합니다. 비틀거려야 하고, 다시 일어나야 하죠. 이 모든 것들을 위한 가장 좋은 벗은 바로 시간과 의지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사카모토 후지에 지음 | 중앙북스 | 1만2천원
14세부터 조산사 일을 시작해 66년간의 4000여 명 아이의 출산을 함께한 조산사의 육아서다. 육아는 지치지만 보람되며, 고되지만 행복한 일이라는 솔직한 경험의 고백이 감동적이다.

“아기는 독립적인 인격체입니다. 엄마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젖 먹고 나면 잘 줄 알았더니 이불에 내려놓으니까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잠들 생각을 안해요’라며 힘들어하는 엄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기도 눈뜨면 놀고 싶을 테니까요. 그럴 때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놀아주었으면 합니다. 아기는 엄마와 다른 인격체입니다. 아직 작다고 얕보지 말고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해주세요.”


장소협찬 빌리캣(바버샵) | 사진 한수정 | 김경민(자유기고가)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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