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소환하는 TV 드라마가 다시 한 번 인기몰이 중이다.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먹고, MBC 청룡이 뒤에서 두 번째 성적으로 아쉽게 시즌을 마감했으며, ‘주최 측’이 올림픽 4위에 오르며 기염을 토한 1988년의 추억은 나의 머릿속에, 가슴 한켠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때 내 나이는 열다섯, 사춘기에 접어든 고등학생이었다. 누구나 특별한 유년 시절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추억 말이다. 요즘의 나는 어떨까? 지금 우리 집은 일곱 살 아들과 네 살 딸의 콤비네이션 플레이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내가 딱 고만했을 때 우리 집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먼저 등장인물이 바뀐다. 성남시 금광동의 골목을 누비던 나와 내 여동생이 상대역으로 나오고, 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어머니가 육아의 주연을 맡는다. 격동의 1980년대 초, 컬러 TV와 과학상자 정도면 얼리어답터 대접을 받았다. SNS는커녕 인터넷도 없었으니 믿을 만한 정보는 시어머니 잔소리나 이웃집 마실을 통해서 얻는 게 전부였다. 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의 특권이었던 야구 점퍼와 매일 대문 앞으로 배달되는 문제지는 최신 유행처럼 번졌다. 먼 중동까지 외화 벌이에 나선 아버지들과 달리 어머니들의 일과는 단조로운 편이었다. 자신은 조연처럼 뒤로 물러나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또 희생했다.

그로부터 강산이 네 번 바뀌는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 사정이 조금 나아졌을까? 정보의 홍수에 치이고 실시간으로 바뀌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나의 어머니는, 우리의 어머니는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개구쟁이 아들을 기르느라 고생한 어머니는 이제 맞벌이 아들 내외의 손자, 손녀를 도맡아 기르고 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난 지오래지만,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길 순 없다는 정신력으로 버티는 셈이다. 그런데도 이제 손자, 손녀 없으면 못살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하는 말 속에 세상의 그 많은 쾌락을 모른 채 그저 자식 잘되고, 손자 잘 크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일생이 보여 마음이 아프다. 어제도 오늘도 어머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과 저녁을 정성껏 차려놓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과 함께 손뼉 치고 춤추며 놀아준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는데, 그 시간마저도 청소 다 빨래다 밥이다 해서 밀린 집안일을 하는데 써버리니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라고는 우리 부부가 아이를 보는 주말이 전부다. 하지만 어머니 힘에 부치는 아이들 걱정이 기우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도 있다.
어머니는 지금보다 몇 십 배는 더 열악한 조건에서 아이둘을 낳고 기른 베테랑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 둘을 거뜬히 다루는 모습을 보면 우리 부부가 꿰차고 있는 최신 육아 정보가 무색할 때가 많다. 아이들은 걷기 시작한 뒤부터 설거지를 하고 바닥이며 창문이며 집 안 구석구석을 닦는 어머니 곁을 떠나거나 시야 밖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숙련된 조교 옆에서 아이는 집 안에 있는 모든 냄비 뚜껑과 소쿠리를 기막히게 돌리기도 하고 수건을 들고 의자 위에 올라가 창문을 닦기도 한다. 아직 성한 기저귀를 말려서 두 번 쓰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말려서 뾰족한 가구 모서리에 칭칭 감아 범퍼를 만들어 세 번 쓰는 것 또한 베테랑다운 면모다. 어머니는 언제 어떻게 아이들의 환심을 살지 모르는 재활용 쓰레기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정육점에 가서 제일 귀한 고기를 사서 손자, 손녀의 입에 넣어준다. ‘자식은 이렇게 키우는 것이다’라고 말하듯이.
글을 쓴 정석헌 대표는 남성 매거진의 잘나가는 에디터에서 ‘초보 아빠’가 되어 육아를 전담했다. 그 이야기는 <아빠도 때론 어부바가 힘들다>에 담겨 있다. 현재 출판사를 운영하며 대중문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육아 현실을 <맘&앙팡>에서 풀어내고 있다.
담당 박효성 기자 일러스트 박새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