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로 자라는 순간, 새로운 시작
지난밤 너무 늦게 잔 탓인지 하루 종일 몸이 무겁다. 침대에서 늦게 일어나면 오전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면서 읽어야 할 책, 써야 할 글로 온 종일 마음이 바빠진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집중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것 저것을 들추다 보면 어느 새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돌아온다.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놀았겠건만 아이는 아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자고 졸라댄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몸도 피곤하니 아이의 청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노는 게 아니라 노는 시늉만 하게 된다. 아이는 9시면 잠자리에 든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부터는 정신이 맑아져서 미뤄둔 공부를 마친 후 새벽 3시를 넘겨야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짐한다. 내일은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다 처리해야지, 아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야지 그러나 항상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다. 머릿속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아이’는 항상 ‘내 할 일들’의 다음 순위가 되고 만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또 아이와의 시간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모든 분야에 해당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삶이라는 영역에서 보다 소중한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앎과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관성, 즉 해오던 일을 하는 습관의 문제다.
삶의 관성이 삶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현실의 삶이 좋은 삶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삶의 방식이 좋은 삶이 아니라도 해오던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간다. 이것은 단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자신감, 책임감의 영향이 더 크다. 나는 새벽 3시를 향해 가는 시계를 보면서 내일은 아이와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어서는 가능할 리 없다. 오늘은 아닌데 내일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몸이 버틸 수 없는데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자신감으로 포장된 근거 없는 낙관이다. 그럴 때마다 희생되는 것은 일보다 육아 쪽이다. 클라이언트는 기다려주지 않지만 아이는 어쨌든 기다려주니까.
단 하루만 일찍 잠들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는데, 밤에 피는 장미는 잠들 줄 모른다.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은 항상 공허한 다짐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어떤 것을 제대로 알면 그 앎에 따라 행tj동하게 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소크라테스 정도 되는 사람에게나 가능했던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최소한 내 경우에 나는 아는 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습관대로 살아가고, 근거 없는 믿음과 욕심에 따라 살아간다. 이것은 곧 온갖 육아 서적과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육아가 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 한 이유 역시 자신에 대한 성찰 없는 정보 습득은 큰 의미가 없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일찍 자자. 새해의 다짐이다. 단지 일찍 자겠다는 결의만이 아니라 내 욕심과 잘못된 자신감에서 벗어나겠다는 다짐이다.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없고, 다 가질 수 없다. 새해 다짐이 늘 실패한 것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고, 다 가질 수 있다는 의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찍 자겠다는 다짐 역시 다시 또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다짐하고 새롭게 시작하기. 바로 그때가 바로 아빠가 아빠로 자라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 권영민은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철학본색’이라는 철학 교육, 연구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 블로그(spermata. egloos.com)에 썼던 에세이를 모아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를 출간했다. 대답보다는 질문을 하고자 하는 철학이 좋은 부모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일러스트 최익견 | 담당 오정림 기자 | 맘앤앙팡 2015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