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흡수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의 아빠 류재천씨는 ‘현진이에게 야구가 평생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 모든 것은 이름에서 시작됐다. 1987년 3월의 일이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며칠 동안 두꺼운 옥편을 뒤적거렸다. 장손인 형 현수(26)의 이름을 따라 어질 현(賢) 자는 그대로 쓰되, 그 뒤에 어울릴 만한 한자를 골라야 했다. 그때 수많은 한자 속에서 갑자기 ‘떨칠 진(振)’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아이의 이름에 쓰기에는 이만한 뜻과 음이 없다고 여겼다. 부모는 이제야 “이렇게 이름을 떨치려고 그 한자가 운명처럼 눈에 들어왔나보다”라고 무릎을 친다. 인천에 살던 류재천씨와 박승순씨 부부는 막내에게 그렇게 ‘현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아들은 26년 뒤, 한국을 평정하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최고의 투수로 자라났다. 바로 지금 한국야구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LA 다저스 류현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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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터울의 형제는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했을 때부터 야구와 함께 살았다. 원래 야구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주말이면 형제의 손을 잡고 야구장으로 향한 덕분이다. 형제가 나란히 인천 연고팀이던 현대 유니콘스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세 부자가 늘 마당에서 캐치볼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이웃집 아이 엄마가 남편에게 늘 “현수랑 현진이 아버지 좀 본받으라”고 바가지를 긁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형보다 더 야구를 좋아하고 체격도 큰 둘째에게 “야구 한번 해볼래?”라는 질문을 던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물음에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글러브를 사고 뛸 듯이 좋아하던 그 눈동자가 아직도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처음에 어머니는 반대했다. “운동해서 성공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고 말렸다. 그러나 아들의 재능과 의지는 어머니의 만류를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였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창영초등학교 야구부에서 테스트를 받은 날, 류현진의 캐치볼을 지켜 본 이무일 감독은 “당장 내일부터 야구를 시키는 게 좋겠다”고 단언했다.
다음 날인 1996년 9월 26일(어머니는 아직도 이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류현진은 야구를 하기 위해 전학 수속을 밟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뒷바라지 해봅시다.” 사실 ‘체육’은 1%의 재능이 99%의 노력만큼 중요하게 여겨지는 극소수의 분야 가운데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류현진은 애초에 또래들이 넘기 힘든 벽이었다. 처음부터 ‘신동’이었다는 의미다. 초등학교 5·6학년 형들보다 4학년 류현진의 폼이 더 유연하고 예뻤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흡수했다. 승부욕도 남달랐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류현진이 씩씩거리기에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다. “6학년 형한테 밀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4학년이 6학년에게 지는 건 당연하다. 6학년이 됐을 때 4학년한테 지지 않으면 된다”고 아들을 다독였다. 아들도 이내 묵묵히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곧 류현진이 6학년 형들을 밀어내고 에이스가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가만히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뭘 못 해줘서 아이가 하고 싶은 걸 못 했다’는 말은 절대 안 듣게 해야겠다고.

류현진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흡수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의 아빠 류재천씨는 ‘현진이에게 야구가 평생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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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최고의 코치, 엄마는 최고의 감독
아버지는 그때 이후로 쭉 최고의 ‘코치’였다. 오른손잡이인 아들이 왼손 투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예 처음부터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사준 게 출발점이었다. 집에 개인훈련용 그물망 설치는 기본. 밤에도 훈련할 수 있도록 전기 전문가인 삼촌의 도움을 받아 옥상에 라이트도 달았다. 인천 월미도의 바이킹과 새벽의 부평 공동묘지는 어린 아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자주 찾은 장소. 또 마당의 배나무에 고무줄을 묶어놓고 수시로 어깨 강화를 위한 튜빙을 시켰다. 이뿐만 아니다. 당시 스타플레이어였던 故 조성민의 아버지가 어릴 때 탁구공으로 토스배팅을 하게 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는 “넌 골프공으로 대신하자”며 집 근처 골프연습장에서 폐공을 모아왔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하드 트레이닝’을 어린 아들이 불평 한마디 않고 따랐다는 점이다. 류씨는 “땡볕 아래서 야구하는 어린 아들이 안쓰러워 ‘그만 두고 공부하겠냐’고 몇 차례 물은 적이 있다. 훈련이 힘들어 보이면 ‘이제 그만 쉬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고개를 젓거나 멈춘 적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도 지극정성이었다. 야구부 학부모회 총무를 맡아 매일같이 아들은 물론 같은 야구부원들 밥까지 챙겨 먹였다. 삼겹살 회식이라도 할 때면 수십 명분의 고기를 직접 굽고 뒤집느라 팔 근육이 마비되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전국대회에 출전할 때는 지방 원정까지 따라가서 몸 관리를 도왔다. 특히 등판한 날은 숙소에 가서 근육을 풀어주는 데 좋은 청주 반신욕을 꼬박꼬박 시켰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전광판의 S(스트라이크), B(볼), O(아웃)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박씨는 언젠가부터 아들과 야구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박사’가 됐다. 아버지는 “현진이가 엄마한테 장난 삼아 ‘감독님’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며 웃었다. 덕분에 류현진은 늘 주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6학년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3학년보다 더 야구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어린 에이스에게 고비가 찾아온 건 동산고 1학년이던 2004년. 미추홀기 고교야구대회에서 형들 대신 4승을 모두 따낸 뒤였다. 팔꿈치가 자꾸 아파서 단골 병원에 가봤지만, 별일 아니라고 했다. 한참을 참고 참다 다른 병원을 찾았더니, 그제야 “인대가 너덜너덜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공 던지는 아들의 전 재산. 안 그래도 대회가 끝날 때마다 매번 정밀검진을 받게 했을 정도로 꼼꼼히 관리해온 왼팔이다.
아버지는 “심장이 철렁했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할 수도 없다. 그냥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고 했다. 온 가족이 격분하고 망연자실한 그 순간, 류현진의 의연함이 빛을 발했다. “빨리 수술 받자”고 담담하게 말했다. 쪽지 한 장도 내밀었다. “이 병원이 팔꿈치 수술을 잘한대”라면서. 부모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술은 짧았지만, 재활에 1년이 걸렸다. 오전 7시에 인천에서 좌석버스를 타면, 2시간 20분이 지난 뒤 서울 강남의 병원 앞에 내릴 수 있었다. 어린 아들은 왕복 네 시간 길을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오가며 재활에 전념했다. 집에 돌아오면, 형과 함께 인조잔디가 깔린 인근 학교 운동장에 나가 끊임없이 달렸다. 부모도 팔을 걷어 붙였다. 아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동산고가 경기를 하는 날이면 무조건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비록 마운드에 오르지는 ‘류현진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몸으로 알려줬다. 당연히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지방에서 밤늦게 경기가 끝난 뒤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료들 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게 했다. 류현진은 자신이 없는 그라운드와 팀원들을 바라보며 의욕과 투지를 키웠고, 동료들의 소중함을 배웠다. 몸이 나아가는 동안 마음도 함께 튼튼해졌다.

아이에게 야구가 영원히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길
류현진은 바로 그 팔꿈치 수술 경력 때문에 고향 연고팀인 SK의 신인 1차 지명을 받지 못했다. 대신 2006년 신인 2차 지명 1라운드에서 ‘운명의 팀’ 한화의 선택을 받았다. 그다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성공 스토리다. 첫 해부터 트리플 크라운(다승·방어율·탈삼진 타이틀 동시 석권)을 달성하면서 시즌 최우수선수상과 최우수신인선수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이후 7년간 꾸준히 한화의 ‘절대 에이스’로 활약하며 투수 부문 기록들을 전방위로 갈아 치웠다. 물론 국제대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모두 앞장서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는 최초로 거액의 포스팅에 성공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직행했고, 다저스 입단 첫 해인 2013년에 무려 14승을 올리며 한국 실력을 세계에 뽐냈다. 별명 그대로 ‘괴물’ 같은 야구 인생이다. 그래도 류현진과 그의 부모는 여전히 똑같다. 아버지는 “우리는 평생 성적 가지고 아이한테 얘기해본 적이 없다. 그저 변함없는 ‘류현진의 1등 팬’으로서 늘 건강하기를 응원하는 게 전부”라고 강조했다. 10년 전 아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새마을호 막차와 영등포역 총알택시에 몸을 실었던 부모는 이제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미국을 오가면서 여전히 막내의 곁을 든든히 지킨다. 어머니는 말했다. “엄청난 관심에 부담을 느끼기보다는, 늘 하던대로 행복하게 야구하는 아들이면 충분하다”고. 그렇다면 아들은 부모의 희망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땡볕 아래서 하루 종일 훈련을 해도 힘들다는 불평 한 마디 않고 따랐다는 어린 시절의 류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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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을 알려준 엄마
든든한 안내자가 되어준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