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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스스로 레벨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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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자전거를 사러 갔다. 또래보다 키가 큰 아이를 보자 사장님은 제법 큰 자전거를 권했다. “앞으로 3년 정도 타려면 이 크기는 되어야 해요. 지금 타기 좋은 자전거는 내년이면 작아져요.” 사장님이 권해준 주황색 자전거에 아이를 태웠다. 조금 큰 감이 있지만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아이는 자전거가 너무 크단다. 자기한테 지금 딱 맞는 검은색 자전거가 좋단다. 자전거 가게를 나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아빠는 비싼 자전거를 사서 1년밖에 못 타면 좀 아까울 것 같아.” 아이도 지지 않는다.

“주황색 자전거는 너무 크단 말이야. 검은색 자전거로 먼저 연습해야 돼.” 아이 생각도 이해가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황색 자전거를 사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커 보여도 키가 자라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딱 맞을 거야.” 검은색 자전거를 아빠가 사주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 아이를 달래고 다시 자전거 가게로 갔다. 주황색 자전거와 검은색 자전거를 나란히 세워두고 찬찬히 비교해봤다. 아이는 여전히 검은색 자전거가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우리를 지켜보시던 사장님이 오셨다. “검은색 자전거는 자전거 레벨 3이 되면 타는 거고, 주황색 자전거는 레벨 5가 되면 타는 거야.” 그 말에 아이 눈빛이 반짝인다. “레벨이 얼마까지 있는데요?” “레벨은 10까지인데, 아저씨는 10이야.”

“아빠는?” 사장님은 내게 눈을 찡긋했다. “아빠는 레벨 8이야. 아저씨만큼 잘 타지는 못해.” 아이는 레벨 5가 되면 탈 수 있다는 주황색 자전거에 앉아보고 싶다고 했다. 자전거는 비싸다는 말에도, 1년밖에 못 타면 돈이 아깝다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던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바로 ‘레벨’이었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단계를 나누고, 레벨을 올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사장님은 간파하고 있었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도 ‘밥 먹어야 레벨 올라간다’고 하면 달라진다.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에게는 어떤 방법보다 ‘안 자면 잠자리 레벨 내려간다’가 더 효과적이다. 지금 아이는 밥먹기 레벨은 7이고, 잠자기 레벨은 아빠보다 높은 9이다. 잠자기 레벨은 정시에 자고 일어나야 하는데 아빠는 늦게 잠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전거 레벨은 이제 5가 되었다. “아빠, 나 오늘 몇 레벨이야?”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원칙은 어제보다 조금 더 높거나 낮게,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조금씩 레벨을 올려가는 것이다. “오늘은 밥 잘 먹었으니까 밥먹기 레벨은 7.2야.” 아이들은 왜 ‘레벨’을 좋아할까? 어쩌면 이렇게 아빠는 ‘레벨을 매기는 사람’이 되어 아이를 수동적으로 ‘레벨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서열 매기는 세상에 길들이고 있는 은 아닐까. 하지만 아이들은 오직 누군가와 비교하고 제압하기 위해서 레벨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레벨 올리기는 게임처럼 재미있고, 무엇보다 레벨을 올리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쉬운 놀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제는 무섭기만 하던 미끄럼틀에서 처음 혼자 내려올 때 아이는 자신감을 얻는다. 보조바퀴를 떼어내고 두발자전거를 타면서 스스로 해냈다는 자부심이 생겨난다. 이것이 내년이면 키가 더 자라 주황색 자전거도 문제없을 거라는 말보다 ‘레벨 5인 아이는 주황색 자전거를 탄다’는 이야기가 훨씬 더 잘 먹히는 이유다. 만약 아빠 레벨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얼마일까? 아이가 두발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동안 나는 지금 보조바퀴 달린 채로 부모 노릇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자라나야 한다. 더 좋은 부모로, 레벨 업!


을 쓴 권영민은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철학본색’이라는 철학 교육, 연구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spermata.egloos.com)에 썼던 에세이를 모아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를 출간했으며, 대답보다는 질문을 하고자 하는 철학이 좋은 부모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담당 우수정 기자 일러스트 애슝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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