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매거진

'파리'의 충고

댓글 0 좋아요 0 교육 쇼핑


글·그림 멜라니 와트 옮김 김선희
그동안 때려죽인 파리가 몇 마리인지 알 리 없는 제게 파리는 그저 인간의 음식에 발을 담그는 더럽고 성가신 날벌레에 불과해서 파리의 생명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청소기에 갇힌 파리 한 마리>(여유당)를 본 이후로는 파리를 때려잡지 않습니다. 그림책 속 파리는 여행가로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집니다. 어느 날처럼 남의 집 거실을 날아다니던 파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지구본 위에 ‘뚝’ 멈춰 섰습니다. 세상 모든 파리들 보란 듯이 세상 꼭대기에 말이지요. 인생 최고의 순간, 절정의 순간을 만끽하던 파리는 이 행복이 영원할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윙’ 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요.

파리가 세상 꼭대기에 있을 때,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청소기 버튼 하나로 파리의 삶 전체가 확 달라져버렸거든요.

파리는 순식간에 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상상조차 못했던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회피와 부정만이 살길입니다. ‘여기 참 멋진걸!’ ‘여기보다 더 아늑한 데가 어디 있겠어.’ ‘혹시 깜짝파티 아닐까?’ 파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러다 이내 청소기에 갇힌 현실을 떠올리고는 타협을 시도하지요.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자기가 어지른 걸 싹 다 치우고 이제 더는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며, 벽에 딱 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청소기에게 쓴 편지가 눈물겹습니다.

청소기님께, 저를 풀어주신다면 약속할게요.
제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곳엔 절대로 안 갈게요.
창문턱, 맛있는 음식, 변기 이런 데 말이에요.
새로 태어난 파리 드림.




<청소기에 갇힌 파리 한 마리>는 ‘슬픔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5단계’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심리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스토리와 그림이 유쾌합니다. 작가인 멜라니 와트는 어느 날 우연히 파리 한 마리를 청소기로 빨아들였는데 순간 파리의 감정이 어떨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파리가 겪은 변화무쌍한 감정을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슬픔의 5단계(부정-분노- 타협-절망-수용)’ 이론으로 풀어냈지요.

누구나 살면서 뜻하지 않은 위기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달관한 듯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파리가 분노 이전에 타협을 시도한 것처럼 사람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 다섯 단계를 거칩니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는 에너지 낭비가 아니라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때로는 필요하고 의미 있습니다. 다만 수용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요, 한편 청소기에 갇혔다 살아난 파리가 우리에게 이런 충고도 하는 듯합니다. “인생의 절정, 화려한 시간이 가장 위험한 때일 수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하고 신중해야 하오.”



글을 쓴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 소장은 <강아지똥>을 읽고 자신의 아픈 마음을 치유한 경험이 있다. 그림책이 가진 위대한 힘을 안 뒤 아동가족상담과 문학치료학을 공부하고, 그림책을 통해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고 있다.



담당 박효성 기자 사진 송상섭 

2016년 8월호
  • 페이스북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